송치욱이 내민 고급스러운 상자에는 은호가 잘 알지 못하는 로고가 붙어 있었다. 배우 일을 하다보면 패션에 큰 관심이 없어도 몇몇 유명한 브랜드 정도는 알게 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송치욱이 고르고 걸치는 것들은 은호에겐 하나같이 생소했다. 적당히 돈이 많은 정도로는 엄두도 못 내는 물건이라는 정도만 알 뿐이었지만, 어쨌거나 은호의 취향과 거리가 먼 것만은 ...
얼마간은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라 당장 눈과 귀가 적은 장소를 떠올리기도 쉽지 않았다. 고심하던 은호는 남자를 데리고 지나는 사람이 적은 주변 벤치로 이동했다. 흡연 구역으로 사용되는 곳인지 낡은 벤치 사이에 놓인 더러운 깡통이 을씨년스러웠다. “왜 보자고 하셨소?” 은호가 오래된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건네자 남자는 손을 내어 받으면서도 썩 탐탁지 않은...
방송국 주변은 늘 혼잡했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환경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은호는 이 근방에 오면 늘 답답함을 느꼈다. 은호는 하루종일 교통체증으로 시달리는 도로를 무심한 표정으로 내다보았다. 승겸은 이제 운전이 매우 능숙해진데다 늘 여유있게 출발하기 때문에 차가 막혀도 약속시간에 늦을 걱정은 없었다. 대부분이 외주 제작이라 정작 드라마 촬영을 하는 동안에...
“정말 같이 안 들어갈래?“ 은수의 기일이라 오전부터 봉안당을 찾았다. 오늘 여기 오리라는 것을 예상했던 모양인지, 승겸은 은호가 집을 나서려는 찰나 기다렸다는 듯이 방에서 뛰어나왔다. 예의를 차리겠다고 말쑥한 정장도 챙겨입었고 새벽부터 세차까지 했는지 차도 반짝반짝했다. 오는 내내 말없이 눈치만 살피는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무슨 화제를 꺼내야 좋을지 알수가...
송치욱을 만난 것은 대본 리딩이 시작되기 전 감독이 사적으로 마련한 식사자리에서였다. 엄밀히 말하면 재회였다. 그는 이허규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우수 고객 중 하나였으니까. 배우 일을 하는 이상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제 막 시작하는 신인 배우가 대스타를 그리 쉽게 만나겠냐고 안일하게 여긴 면도 없지 않았다. 드러내기 껄끄러운 관계이니 그 쪽...
비밀이 없는 사람은 드물다. 사람들이 비밀을 만드는 이유는 각양각색이겠지만, 비밀이 밝혀짐으로 인해 크고 작은 무언가를 잃게 된다는 사실만은 다르지 않다. 잃게 될 무언가가 중요할수록, 사람들은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잃는다. 잃지 않기 위해 잃은 것들. 은호는 이제 어느 쪽이 더 중요했는지도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우리 송 배우님이 진짜 와 ...
“컷! 오케이!” 촬영 종료를 알리는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자 일제히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지난 3주 간은 정말이지 숨 돌릴 틈도 없는 강행군이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우리 드라마 잘 되고 있다니까, 덕분에 힘든 줄도 몰랐네요.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촬영을 무사히 마쳤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와 기쁨의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구름아, 안 돼! 뛰지 마! 천천히!” 새하얀 털을 가진 강아지는 초여름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구름같았다. 은호는 공원 벤치에 앉아 세상에서 가장 신난 얼굴로 뛰어다니는 강아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시선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벤치까지 헥헥거리며 달려온 녀석은 은호의 무릎으로 펄쩍 앞발을 들어올렸다. 은호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몽실몽실한 털뭉치와 눈을 맞...
“저…, 안녕하세요.” 나이가 지긋한 관리인이 TV에서 시선을 떼며 느릿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승겸은 두꺼운 돋보기 안경 너머로 저를 쳐다보는 관리인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무슨 일이신데?” 평범한 호기심이 담긴 시선을 피해 눈을 돌리자 그가 보고 있던 TV 화면이 시야에 들어왔다. 커다란 십자가를 배경으로 단상에 선 목사가 목이 터져라 외칠 때마다 ...
승겸은 경기도 외곽의 한적한 카페로 오수진을 불러냈다. 만에 하나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곤란했기 때문에 회사에서도 멀고 북적대지 않은 장소를 신중하게 골랐지만 그녀에게는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에 가까웠다. 전처럼 그녀의 말에 끌려다니는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약속한 시간에서 15분이 지나도록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촬영장에 있는 최은호에게는 병...
드라마 방영과 함께 개설된 최은호의 별스타 계정은 한 달이 채 되기도 전에 팔로워 500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즈음부터 매일이 강행군이라 최은호는 본인의 SNS 계정에 접속하기는 커녕 본방 모니터링조차 쉽지 않았지만, 승겸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인기를 대신해서 실감하고 있었다. (사진) eunho.c__i 막바지 촬영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
- 안녕하십니까. 527번 최은호입니다. - 네. 준비해 온 거 해보세요. - 네! 시작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것은 승겸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보물이었다. 해상도가 떨어지는 장비로 촬영해 열화된 듯 보이는 영상 속에는 20대 초반의 최은호가 있었다. 젖살이 남아 부드러운 얼굴선과 귀를 살짝 덮는 동그란 머리모양, 오디션을 위해 차려 입었을 정장과...
1차 비엘을 씁니다. ^_^ 트위터 @aettie_ss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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